원칙과 상식의 초심이 사라진 자리에 공천 걱정만 가득

윤미향 사태가 드러낸 586의 민낯

채진원(이하 채) : 북학파들이 활발하게 활동한 뒤로부터 200년이 훨씬 넘게 흘렀습니다. 그러나 북학파가 나라를 망하게 만들고 백성들의 삶을 피폐시키는 요소들로 개탄했던 편협한 소중화 주의와 극단적인 선악의 이분법은 현재까지도 우리나라에서 여전히 기승을 부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분법적 선악 구도와 도덕적 우월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일수록 여당일 때와 야당일 때의 모습이 너무나 다릅니다. 남들과 자신에게 들이대는 잣대에서 일관성이라고는 전혀 발견되지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윤미향 전 더불어민주당 의원이 일본 제국주의의 희생자인 위안부 할머니들을 내세워 본인의 사익을 취해왔다는 비판이 거세게 제기되었을 무렵, 586 세대에 속하는 내로라하는 인물들 가운데 여럿이 정의기억연대에 회계와 운영의 투명성을 요구하기는커녕 윤 의원을 오히려 두둔했습니다. 이용수 할머니를 비난하는 막말성 발언을 서슴지 않았습니다.

공희준(이하 공) : 그와 같은 터무니없는 망발을 586들이 어째서 서슴없이 해대는 걸까요?

※ 채진원 교수는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한 민주당 586 세대를 비판했다. (사진 : 현경학 기자)
※ 채진원 교수는 제 식구 감싸기에 급급한 민주당 586 세대를 비판했다. (사진 : 현경학 기자)

채진원 : 윤미향 의원을 자기네 가족, 즉 패밀리의 일원이라고 여기는 이유에서였습니다. 이러한 상황은 박원순 전 서울시장이 성추문 사건에 연루되어 극단적 선택을 했을 적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상당수의 586 세대는 시시비비를 정확히 가리려고 노력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 친소관계에만 좌지우지돼 형평성과 객관성을 잃어버린 행동에 열중했습니다.

그로 말미암아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이라고 부르는 등의 2차 가해가 여태껏 태연히 이어지고 있습니다. 기본적 공인의식을 깡그리 망각한 채 사적인 친분에만 얽매여 제 식구 감싸기에만 급급하다 보니 이와 같은 불미스러운 광경들이 끊임없이 빚어져왔습니다. 그분들이 과거에 주야장천으로 부르짖었던 민주도, 연대도, 공공선도 모조리 폐기된 형국입니다.

이 와중에 국민들을 특히나 실망시킨 사람은 한때 여성계의 대모로 통하던 남인순 의원이었습니다. 피해자를 피해자로 부르지 못하게끔 하는 일에 남 의원이 주도적으로 개입한 것으로 드러났기 때문입니다. 저는 남인순 의원이 만약 지금 제 앞에 앉아 있다면 박 전 시장이 더불어민주당이 아닌 국민의힘이나 다른 정당 소속이었어도 피해자의 상처를 후벼 파는 쪽으로 사건 처리에 임했을지 묻고 싶습니다. 저는 남 의원이 그런 경우에는 피해자 중심주의 입장에 철저하게 섰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하지만 가해자로 지목된 인물을 자기 식구라고 생각하니 피해자를 피해 호소인으로 호도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남인순 의원은 생물학적 의미의 586 세대는 아닙니다. 그러나 그가 현재 우리 사회의 주류로 군림하는 586 세대의 세계관을 전형적으로 체현하고 있는 정치인이라는 점에 대해서만은 그 누구도 이의를 달기가 어렵습니다.

586 정치인들 정치적 실향민이 되다

586 정치 엘리트들이 내로남불의 위선에 탐닉하는 근본적 원인은 그들이 초심을 잃은 데 있습니다. 야당이었을 때에 표방한 원칙을, 출세하고 성공하기 이전에 주장한 상식을 그들은 여당이 되고 주류가 되자 잠시의 망설임조차 없이 내팽개쳤다고 하겠습니다. 원칙과 상식이 실종된 자리에는 고무줄처럼 수시로 늘어났다, 줄어들었다를 반복하는 이중 잣대가 떡하니 들어섰습니다.

그러한 맥락에서 586 세대 정치인들을 정치적 실향민으로 규정할 수 있습니다. 자신들의 본질적 가치가 비롯된 출발지점을 머릿속에서 완전히 잊은 것처럼 보이거든요. 시민사회에서 잔뼈가 굵은 정치인이 시민들을 무시합니다. 여성계 출신 정치인이 여성인권을 유린합니다. 청년 몫으로 국회에 입성한 젊은 정치인이 흙수저 청년들의 박탈감과 좌절감에 한사코 눈을 감습니다. 왜 그러느냐? 생각이 없는, 곧 무사유의 정치를 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생각이 없이 살면 악의 구렁텅이로 빠지기 쉽습니다. 이게 바로 독일 태생의 유대인 정치철학자인 한나 아렌트가 악의 평범성개념을 정립한 까닭이었습니다. 생각이 없는 사람들이, 사유하지 않으려는 인간들이 정치권에서 도돌이표처럼 계속 변함없이 똬리를 틀고 있다는 사실이야말로 저는 한국 정치가 오랫동안 직면해온 비극의 원천이라고 봅니다.

문재인 대통령은 점잖은 선비 같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왔습니다. 선비는 긍정과 부정, 명과 암의 양면성 모두를 함의하는 용어입니다. 그런데 선비 유형의 정치인은 자칫하다가는 무능의 표상으로 자리매김할 수도 있습니다. 선비는 흔히 점잖은 사람을 가리킵니다. 문제는 한 나라의 통치자가 마냥 점잖기만 해서는 국가적 난제의 해결과 시대적 모순의 극복을 도모할 수가 없다는 점에 있습니다.

※ 채진원 교수는 586 세대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가에 의문을 품었다. (사진 : 현경학 기자)
※ 채진원 교수는 586 세대가 '노무현 정신'을 계승하고 있는가에 의문을 품었다. (사진 : 현경학 기자)

: 선비가 성과를 창출하는 사람은 아니니까요.

: 그렇죠.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며 좋은 게 좋은 것 아니냐는 황희 정승 방식의 모호한 접근법으로는 문제를 확실하고 효과적으로 풀어나가기 힘듭니다. 되는 일도 없고, 안 되는 일도 없는 뒤죽박죽 상태가 돼버리기 일쑤입니다.

저는 586 세대가 노무현 정신을 과연 진정으로 계승하고 있는지에 대해 솔직히 말씀드리면 몹시 회의적입니다. 노무현 정신의 핵심적 알맹이는 반칙과 특권 없는 세상을 만드는 일입니다. 노무현 정신을 실천하려면 원칙 없는 승리를 좇기보다는 원칙 있는 패배를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노무현 정신에 충실하다면 퇴영적 복고주의를 추구하는 대신에 미래를 멀리 내다보며 후세의 지속 가능한 번영과 행복을 염두에 둔 통 크고 실용적인 정치를 해야만 합니다. 왜냐면 노 전 대통령은 청년들과 아이들에게 정의롭고 공정한, 그리고 살기 좋은 대만민국을 물려주기를 간절히 바랐기 때문입니다.

그럼에도 586 정치인들은 노무현 정신과는 정면으로 배치되는 짓들을 거리낌 없이 저질러왔습니다. 그들에게는 우리나라의 미래세대가 아니라 자신의 가족과 주변인들이 늘 먼저였습니다. 원칙과 상식이 한국사회에서 구현되지 못하는 사태가 무서운 게 아니라, 자기가 선거 때 당의 공천을 받지 못하는 일을 그보다 몇 배는 더 두려워했습니다.

(편에서 계속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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