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성공사례
그 두 번째 이야기

아이젠하워, 문고리 권력을 제도화하다

 출마 당시 아이젠하워는 당내 동부 온건보수파를 대변했다. 즉 “(연패행진을 끝내고 정권을 되찾아오기 위해서는 불가피하게) 민주당의 뉴딜정책과 복지국가프로그램을 일정 정도 유지하되, 공공부문 매각 등 보다 효율적이며 시장 친화적으로 적극 개혁하겠다.”라고 공약했다. 이를 통하여 “균형예산을 유지하고 특히 중산층과 서민 보호를 위하여 물가 및 임금 통제를 종식시키겠다.”는 약속도 내걸었다. 사회문제로 “정부 등에서 암약하는 공산주의자들과 전쟁을 벌이면서도 인종・종교・국적에 대한 차별을 반대한다.”고 밝혔다. 그리고 외교안보는 “민주당정권이 충분히 예방하지 못한 한국전쟁을 조기에 종식시키며, 핵 억제와 반공을 명확하게 하고 이와 동일한 가치로 유엔을 지원하겠다.”고 공언했다.

 뉴햄프셔 주지사 시절의 셔먼 애덤스 : 출처는 뉴햄프셔 주정부 기록보관소
 뉴햄프셔 주지사 시절의 셔먼 애덤스 : 출처는 뉴햄프셔 주정부 기록보관소

 한편 대부분의 정치 전문가들은 아이크와 벌써 세 번째 출전한 로버트 태프트 연방 상원의원이 공화당 대선후보 지명전에서 백중세일 것이라고 분석했다. 실제로 중서부 강경 보수주의가 근거지인 태프트는 고립주의(isolationism, 1차 세계대전 참전을 미국 민주주의 수호가 아닌 유럽 제국주의 국가들의 어리석은 싸움에 휘말렸다고 하는 주장임)를 역설하며 만만치 않은 세를 확장해왔다. 하지만 전략기획 능력이 뛰어나며, 성실한데다가 디테일도 강한 셔먼 애덤스는 아이젠하워가 태프트 의원을 상대로 신승을 거두는데 큰 기여를 한다. 참고로 1952년 대선 슬로건은 아이젠하워의 높은 개인 인기를 기반으로 한 “I Like Ike”였다. 아이젠하워가 승리한 1952년 대선은 20년 만에 처음으로 공화당이 백악관에 복귀하기도 한 기록이다. 이때는 또한 하원과 상원에서 공화당이 각각 22석 및 2석을 추가해 6년 만에 과반의석을 탈환했다.

 군 지휘관 출신 아이젠하워는 ‘참모장의 사전검토부터 거치는 군사모델’을 백악관에도 그대로 적용했다. 비서실장 중심의 현대적인 백악관시스템은 그야말로 아이젠하워의 결단이었다. 1차 후버위원회(First Hoover Commission)가 발표한 보고서와 2차 대전 이후 계속 터져 나오는 대통령에 대한 효과적인 보좌 요구, 그리고 아이크가 최전방에서 직접 군사령부를 운영하며 경험한 바탕으로 백악관 체제를 현대적 감각에 맞는 CEO형으로 인수팀 단계에서 지체 없이 재정비한 것이다. (분기별 대통령연구, JSTOR, 1994년 봄호, 브래들리 패터슨) 이에 따라 백악관은 새롭게 18명의 참모조직 형태를 갖췄으며, 이후 존 F 케네디 등 대통령들이 대부분 승계하고 발전시켰다.

 아이크 이전 대통령까지는 기껏해야 개인비서(the president's private secretary) 또는 문지기(gatekeeper)라고 비아냥거리는 가신들로부터 부분적인 조력을 받는데 그쳤다. 애덤스는 백악관 비서실장(White House Chief of Staff) 직함을 갖는 사상 첫 번째 인물로 근무를 시작했다. 6년 가까운 재직기간 아이젠하워가 만든 시스템 덕분에 그의 영향력은 실로 막강했다. 심지어 각료와 NSC보좌진 극히 일부를 제외하고 공화당 최고위급 간부들조차 대통령 독대는 반드시 애덤스 비서실장을 거쳐야 했다. 대신에 그는 몸이 부서지도록 존 매카시 상원의원 등 당내 강경보수파들과 민주당의 급진적 좌파의원들의 거친 공세를 막아내며 정치초년생 아이젠하워를 철통 방어했다. 이렇게 아이크의 신임을 한 몸에 받았던 아담스의 백악관 비서실장 근무기록은 무려 5년 260일로 64년이 지난 현재도 여전히 깨지지 않고 있으니 가히 기네스북 감이다. (계속 이어집니다)

최광웅 (본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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