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보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성공사례
그 첫 번째 이야기
대통령제 국가에서 정권을 재창출하거나(대한민국) 연임에 성공한다면(미국, 프랑스) 그래도 어느 정도 성공한 정부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서 노태우, 김대중, 이명박 정부는 성공했고 김영삼, 노무현, 박근혜, 문재인 정부는 실패했다. 마찬가지로 미국에서도 단임으로 마감한 트루먼, 닉슨, 카터, 조지 HW. 부시, 트럼프 정부 등은 실패했다.
초보대통령과 노련한 사업가&정치가의 결합
US갤럽은 1946년부터 매년 “미국에서 가장 존경받는 남녀”를 설문으로 주관식 여론조사를 해오고 있다. 그런데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1950년, 1952~60년, 1967~68년 등 12회나 선택되며 버락 오바마와 공동 1위를 차지했다. 특히 아이젠하워(애칭 Ike, 아이크)는 대통령직에서 물러난 한참 후인 1967~68년에도 가장 존경받는 인물로 선택받을 만큼 20세기 미국 대통령 가운데 엄청난 인기를 누렸다.
선출직 경험이 전무한 아이젠하워는 1952년 미합중국 대통령직에 도전했다. 그는 애들라이 스티븐슨 일리노이 주지사를 상대로 선거인단투표 442 대 89표로 압승을 거두었다. 4년 뒤 리턴매치에서 역시 아이젠하워는 457 대 73표로 스티븐슨을 가볍게 제치고 연임에 성공하였다. 2차 대전의 영웅이었으나 정치초보자인 아이젠하워의 대박비결은 도대체 무엇일까?

아이젠하워는 백악관 비서실장으로 셔먼 애덤스(백악관 입성 당시 54세, 이하 같음) 뉴햄프셔 주지사를 발탁했다. 대통령(63세)보다 9살 연하인 애덤스는 아이크의 초선 및 재선 선거대책본부장으로 활동했다. 식료품상 아들로 태어난 애덤스는 1차 대전 참전 뒤 고향인 버몬트로 돌아와 목재업에 뛰어들었고, 뉴햄프셔로 진출해 제지업・은행업까지 진출하며 20년 넘게 제법 사업을 일궈냈다. 1940년 뉴햄프셔 주하원의원에 첫 당선됐으며 재선 후 의장직에 올랐고, 1946년에는 연방하원의원 배지를 다는 등 승승장구했다. 2년 뒤 다시 주지사에 도전해 당선됐으며 1950년 재선에 성공했다.
애덤스는 주지사 재직 중 주정부 혁신을 위한 조직진단위원회를 설치·운영했으며, 은퇴자 비중이 높은 뉴햄프셔 특성에 맞도록 노인지원비중 확대 및 연방차원의 노령보험가입허용 법안제정에도 앞장섰다. 또한 미국주지사협회 회장을 역임하며 전후 경기침체를 겪는 미국이 공공과 민간부문 모두 대대적인 근검절약 실천을 촉구하였다. 이 캠페인이 바로 「균형예산노선」인데, 당시 공화당은 애덤스를 주요 정책포스터의 상징인물로 채택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마침 이 노선은 대선출마를 결심한 아이젠하워와 손발이 딱 맞아떨어졌다. 결국 텍사스 출신이며, 뉴욕에서 콜롬비아대학 총장으로 봉직한 아이젠하워와 전혀 인연이 없던 셔먼 애덤스가 궁합이 딱 맞아떨어진 계기다. 게다가 프라이머리가 가장 먼저 시작되는 뉴햄프셔에서 선출직 5선의 풍부한 정치적 기반을 갖춘 애덤스의 아이크 대선캠프 합류는 천군만마였다. (계속 이어집니다)
최광웅 (본사 발행인)